신학과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며 강의와 글쓰기를 해왔다. SNS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. 번역가로서 『신화를 찾는 인간』(2015, 문예출판사)외 여섯 권의 심리학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.
책 속으로
붕어빵의 꿈
옻칠처럼 시꺼먼 무쇠알 속에서 가스불로 부화한 내 몸통 안에도 부드럽고 뜨거운 붉은 심장들이 있다
알을 깨고 나와 찬바람 맞으며 지느러미와 꼬리 차갑게 식었지만 아직도 내 안에는 남극 빙하도 녹일 뜨거운 심장들이 힘차게 박동친다
누런 황금빛 내 몸 구석구석에는 초콜릿보다 더 짙은 화상자국 투성이지만 난 아직도 녹두빛 금강물에 몸을 담가서 선홍색 아가미로 숨을 쉬며 황금빛 모래바닥 위를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간절한 꿈을 차마 버리지 않았다
소리 없이 쌓인 눈으로 온 세상은 밀가루 쏟아놓은 반죽통 같은데 지나는 차도 끊긴 정류장 앞 손수레 위에선 작은 전등 두 개가 깜박거리며 추위에 떨고 있다
밤은 더 깊어가고 내 옆 철망에 놓인 황금색 물고기들과 진갈색 물고기들은 칼바람에 식어서 점점 딱딱하게 굳어만 가지만 내 안에 있는 붉은 심장들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다시 헤엄칠 때를 기다리고 있다
비록 작디작고 설탕에 버무려져 짓이겨졌지만 아직도 그 붉은빛 잃지 않은 작은 심장들이 겨울이 지나면 곧 돌아가야 할 금강을 그리며 콩닥콩닥 소리로 내 온 몸을 울리고 있다
산골마을 중
밤새 정겨운 이야기를 이어가는 곳 내가 갈망하던 많은 소유와 명예가 모두 무거운 짐이었음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하는 수도원
잿빛 구름 하늘 덮은 흐린 가을밤이면 반딧불이 별빛을 대신하는 곳 살면서 잊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이 고스란히 보관된 유실물 보관소
지나온 삶의 과오를 눈물로 뉘우치게 하는 통곡의 벽 삶은 비움으로써만 가득 찰 수 있음을 내게 가르치는 따스한 교실
병어 두 마리 중
나란히 누워 하늘만 보는 두 친구 손질을 마친 은색 병어 두 마리
할 말이 많지만 입을 굳게 닫은 둘은 신안 앞바다를 휘젓던 호기 좋은 사내들이었다
가고 싶은 곳도 많고 보고 싶은 곳도 많던 둘은 매일 매일 쑥빛 바다보다 더 짙푸른 꿈을 꾸었다
어느 날 머리 위로 날아온 나일론 그물에 걸린 둘은 파아란 색 페인트 칠해진 뱃바닥에 던져졌다가 새벽 어시장의 회색빛 시멘트 바닥을 거쳐 얼음이 재워진 박스에 실려 트럭을 타고 롯데백화점에 왔
차례 병어 두 마리/민들레꽃/내 시계/어린 이 날!/별들이 있다/라일락 나무/플라타너스/땅이 운다/태양을 위한 변명/하늘을 나는 비닐봉투/밥알의 눈물/에스컬레이션/풀벌레들은 노래한다/지금 그리고 여기/아스팔트 위의 매미/여름과 가을이 잔다/줄을 서는 사람들/여름에게 미안하다/비가 오는 날에는 너를 생각한다/천도와 황도/물 긷는 밤/나사 빠진 가로등/선풍기에게/단풍/엘리베이터 안에서/나무들이 서 있다/산골 마을/등대/까마귀의 웃음/커피는 사랑을 닮았어/새들의 하루/피리 부는 사나이/속도제한 표시판/우울의 미소/슬픔이 세상을 구원하리라/겨울 이야기 1/겨울 이야기 2/겨울 이야기 3/겨울 이야기 4/겨울 이야기 5/겨울 이야기 6/더 아름다워져야 한다/이별 연습/귀뚜라미/가을밤/군밤 탈영/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/붕어빵의 꿈/기적/달의 꿈/후회/흥정/촬영/겨울이 내 품속으로 들어왔다/기도/보이지 않아도/어느 나무의 겨우살이/온기/붉은 은행나무/난 꿈을 꿔/색깔 있는 산책/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와 세 가지 소원