신학과 임상심리학을 공부하며 강의와 글쓰기를 해왔다. SNS에 꾸준히 시를 발표하며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. 번역가로서 『신화를 찾는 인간』(2015, 문예출판사)외 여섯 권의 심리학 서적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.
책 속으로
식어버린 커피를 위한 파반느
까아만 뜨거움을 담은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음대로 되지 않은 세상 일을 염려하느라 미처 네게 따사로이 입 맞추지도 친절한 인사를 나누지도 못했다 카페의 홀을 가득 채운 텅 빔과 가사를 알 수 없는 샹송곡에 시나브로 젖어들며 무덤덤하게 컵을 만지작 거리는 동안 빠알간 컵에 담긴 너는 점점 식어갔다
시간이 속절없이 지나는 동안 수돗물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쓰디쓴 네게 뒤늦은 입맞춤으로 말을 걸었지만 너는 진한 향기와 컵 안쪽에 짙은 갈색의 줄만 남긴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식어버린 네게서는 꽃향기도 과일향기도 느껴지지 않고 다만 남극의 빙하보다 더 차가운 냉기만이 감돈다
또한 신맛도 쓴맛도 짠맛도 아닌 슬픔의 깊은 맛만이 나의 입 안에 허전하고 오랜 여운을 남긴다
사랑은 기다림이라고 하지만 지나친 기다림은 너에게 잊혀짐을 의미할 수 있음을 나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 영원한 순간을 나는 허무하게 놓치고 말았다
뜨거운 흑진주 같은 신들의 음료여! 온기를 잃은 네게 입맞춤하며 나의 무딘 마음을 뉘우친다 손 끝에 남아있는 너의 뜨거운 체온을 기억하고 컵 안에서 찰랑대는 너의 물결을 말없이 바라보며 영혼 깊이 나의 무심함을 뉘우치는 참회록을 새긴다
지상천국 중
살아서 네 명의 아내를 얻을 수 있는 거룩한 나라 죽어서 일흔 두 명의 아내와 쾌락을 즐길 수 있는 순교자들의 나라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칼같이 구분된 나라 여자 속옷은 남자 상인이 팔고 여자는 남편이 사다주는 속옷을 군말없이 입어야 하는 나라
천국이 된 카불에는 산 자는 머물 수 없다 천국은 죽은 자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레반 대원들은 열심히 AK47소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한 사람이라도 더 천국에 보내려고 한 사람이라도 더 쾌락을 누리게 하려고
탁상등의 기도 중
약하기에 편안하고 나를 가리기에 남을 드러내며 꺼짐으로써 잠을 줄 수 있고 어두움 속에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손길이 쉽게 닿을 곳에서 언제든 깨어서 응답할 수 있는 등대와 같은 빛이 되게 하소서
정오의 제사 중
부끄러운 나의 죄의 연대기를 낭독하는 바람 소리와 규칙적으로 울리며 나의 유죄를 선고하는 공사장 망치소리를 들으며 나는 뜨겁고도 쓴 피를 내 영혼에 채운다
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죄를 짓는다는 것 살아남았다는 것은 용서받을 시간을 얻었다는 것
나는 오늘도 따스한 가을 햇살이 내리쪼이는 카페 앞 돌계단에 서서 내 영혼의 깊은 곳까지 천천히 커피를 부으며 참회를 구한다
차례 빈 방 안에서/오늘/꼬리 짧은 붕어/나는 몰랐다/4월에 내리는 비/비오는 날/한강/유진 오닐/손님/자가 격리/ 유산/도(度)/이주일/종말징후목록/8월, 넌 여름이 아니다/지상천국/홀로 있는 자리/어머니/과학 선생님/수학 선생님/미워하는 너에게 보내는 편지/시간여행자/구현이/새벽기도 가는 길/아들에게 주는 잠언/재쫑재 느티나무/텅 빔의 미학/신호등/가슴 답답하고 우울한 날에는/천고마비/가을 물들다/슬픔/강물과 산의 잠언/태극기가 바람에/땅에 내려온 별들/모순/타임머신1/타임머신 2/식어버린 커피를 위한 파반느/동행/전투화를 신은 목사/탁상등의 기도/가을의 기적/빚의 자녀들에게/밤 헤는 낮/발톱을 깎으며/돌예수/정오의 제사/화장지/가을/나뭇잎/부지런한 가을/라면은 기다리지 않는다/삶이 사람이다/누나의 택배 박스/아차/그것이 삶이다/아낌없이 주는 나무/산길/닫힌 방/거울 앞에서/조우[遭遇]/클리프 행어